티스토리 뷰
농구를 오래 봤는데도 저는 한동안 공이 없는 선수들을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경기에서 가드가 드리블하다 갑자기 활짝 열린 공간을 찾아내는 장면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알고 보니 동료 한 명이 조용히 스크린을 걸어준 덕분이었고, 그 순간부터 픽앤롤이라는 전술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스크린, 이게 전술의 출발점이었다
저도 처음엔 픽앤롤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었습니다. 픽(Pick)이 뭔지, 롤(Roll)이 뭔지 각각 알아도 둘이 붙으면 왜 그렇게 자주 쓰이는 전술인지 체감이 안 됐습니다.
픽앤롤의 첫 단추는 스크린(Screen)입니다. 스크린이란 공을 가진 선수를 막는 수비수 앞에 동료가 몸으로 자리를 잡아 이동 경로를 막는 행동을 말합니다. 출처: NBA 공식 규칙(Rule No. 4)에 따르면 스크린은 과도한 신체 접촉 없이 상대 수비수가 원하는 위치로 이동하는 것을 지연시키는 합법적인 행동으로 정의돼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드 A가 드리블을 가져가는 상황을 떠올려보면, 센터 B가 A의 수비수 옆에 와서 자리를 잡습니다. A가 B의 옆을 바짝 붙어 지나가는 순간 A를 쫓던 수비수는 B를 피해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짧은 순간, 수비에는 틈이 생깁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의식하며 경기를 보기 시작한 건 생각보다 늦은 편이었는데, 한 번 보이기 시작하니 한 경기에서 수십 번씩 반복되는 게 보였습니다.
여기서 스크린을 걸어준 B는 그 자리에 멈춰 있지 않습니다. 골대 방향으로 곧장 움직입니다. 이것이 롤(Roll)입니다. 스크린을 뜻하는 픽과 골대로 향하는 움직임을 뜻하는 롤을 합쳐 픽앤롤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름 자체가 이미 전술의 전체 구조를 담고 있는 셈입니다.
- 픽(Pick): 동료 수비수 앞에 몸으로 벽을 만들어 이동을 막는 스크린 동작
- 롤(Roll): 스크린 이후 스크리너가 골대 방향으로 파고드는 움직임
- 볼 핸들러(Ball Handler): 공을 들고 픽앤롤을 주도하는 선수, 주로 가드
- 스크리너(Screener): 스크린을 걸어주는 선수, 주로 빅맨(센터·파워포워드)

롤맨을 보기 시작하자 농구가 달라졌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픽앤롤을 처음 이해한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이 있는데, 스크린이 걸리고 나서도 공을 가진 선수만 계속 눈으로 따라가는 겁니다. 저도 한동안 그랬습니다. 그런데 정작 픽앤롤의 진짜 위력은 스크린 이후 골대로 들어가는 롤맨(Roll Man)에게 있다는 걸 나중에야 실감했습니다.
롤맨이란 스크린을 건 뒤 골대 방향으로 파고드는 선수를 말합니다. 수비 입장에서 롤맨은 꽤 까다로운 존재입니다. 볼 핸들러를 쫓는 데 신경을 쓰면 롤맨이 그 사이 골대 아래로 들어오고, 롤맨을 막으려 하면 볼 핸들러가 오픈 상태가 됩니다.
NBA 공식 통계에서도 픽앤롤은 별도의 플레이 유형으로 분류될 만큼 비중이 큰 전술입니다(출처: NBA Stats). 볼 핸들러의 픽앤롤 공격과 롤맨의 공격을 따로 집계할 정도니 현대 농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수비 입장에서 픽앤롤에 대응하는 선택지는 크게 세 갈래입니다. 기존 수비수가 스크린을 뚫고 끝까지 볼 핸들러를 쫓는 방법, 센터를 맡던 수비수가 앞으로 튀어나와 볼 핸들러의 돌파를 막는 방법, 그리고 두 수비수가 맡은 선수를 서로 바꿔 막는 스위치(Switch)가 있습니다. 스위치란 스크린 상황에서 각자의 마크맨을 교환해 수비 공백을 메우는 전술적 대응입니다.
제가 직접 이 세 가지 장면을 의식하며 경기를 보니, 공격 팀이 수비의 선택을 보는 즉시 역으로 대응하는 과정이 보였습니다. 수비가 스크린 뒤로 내려서면 볼 핸들러가 그 자리에서 3점슛을 던질 수 있고, 수비가 강하게 앞으로 나오면 골대로 파고드는 롤맨에게 패스가 연결됩니다. 두 수비가 한꺼번에 볼 핸들러 쪽으로 몰리면 반대편에서 기다리는 슈터에게 공이 돌아갑니다.
수비 읽기, 좋은 포인트가드가 보이는 이유
어린 시절 저는 마이클 조던이 공을 잡으면 다음 슛만 기다렸습니다. 《슬램덩크》나 《마지막 승부》를 보면서 농구를 좋아하게 됐을 때도 덩크, 슛, 패스처럼 눈에 바로 들어오는 장면이 전부였습니다. 그 시절 농구가 화려한 결과를 보는 재미였다면, 지금은 그 결과가 만들어지기까지 수비의 움직임을 읽는 과정을 보는 재미가 더해졌습니다.
픽앤롤 상황에서 볼 핸들러는 몇 초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스크린을 이용해 자기가 직접 득점을 노릴 것인지, 롤맨에게 패스를 찔러줄 것인지, 아니면 반대편에서 오픈된 슈터에게 공을 보낼 것인지. 이 판단의 속도와 정확도가 포인트가드를 평가하는 핵심 기준 중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서 픽앤팝(Pick and Pop)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픽앤팝이란 스크린을 건 선수가 골대로 들어가지 않고 반대로 외곽으로 빠져 3점슛을 노리는 변형 전술입니다. 스크리너가 팝 아웃(Pop Out), 즉 외곽으로 튀어 나오는 동작에서 이름이 붙었습니다. 외곽슛 능력을 갖춘 빅맨이 늘어난 현대 NBA에서 픽앤팝은 특히 자주 쓰입니다. 제가 직접 관찰해보니 픽앤팝 상황에서 수비는 롤맨을 막을 때보다 더 큰 수비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스크리너가 골대로 들어올 것인지 외곽으로 빠질 것인지 예측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결국 픽앤롤은 2대2로 시작하지만 5대5 전체 공격으로 확장됩니다. 두 선수가 만든 수비 혼란이 나머지 세 선수의 위치까지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픽앤롤을 이해하고 나서 경기를 보면, 공이 없는 선수들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까지 보이게 됐습니다. 그전에는 그냥 배경처럼 느껴졌던 선수들이 이제는 공격 전체의 설계도 안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픽앤롤이랑 스크린이랑 다른 건가요?
A. 스크린은 몸으로 수비 이동을 막는 동작 자체를 가리키고, 픽앤롤은 그 스크린(픽) 이후 스크리너가 골대로 파고드는 롤까지 포함한 전체 세트 플레이를 말합니다. 스크린은 픽앤롤의 첫 단계일 뿐입니다.
Q. 픽앤팝은 픽앤롤이랑 뭐가 다른 건가요?
A. 스크린 이후 스크리너가 골대 안으로 들어가면 픽앤롤, 반대로 외곽으로 빠져 슛을 노리면 픽앤팝입니다. 외곽슛이 좋은 빅맨이 많아진 현대 NBA에서 픽앤팝은 픽앤롤만큼 자주 쓰이는 전술입니다.
Q. 수비가 스위치를 하면 픽앤롤이 막히는 건가요?
A. 스위치, 즉 두 수비수가 마크맨을 서로 바꿔 막는 대응도 완벽한 답이 아닙니다. 스위치를 하면 덩치 차이가 생기는 미스매치(Mismatch) 상황이 만들어지고, 공격 팀은 그 유리한 매치업을 바로 공략합니다. 어떤 수비 선택이든 공격 팀에 기회가 하나씩은 열리는 구조라서, 픽앤롤은 지금도 NBA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공격 중 하나입니다.
Q. 픽앤롤을 처음 보는 사람도 경기 보면서 구분할 수 있나요?
A. 충분히 가능합니다. 볼 핸들러가 드리블을 가져가는 순간 동료 한 명이 수비수 옆에 딱 멈춰 서는 장면을 찾으면 됩니다. 그 다음 그 동료가 골대 쪽으로 움직이는지 외곽으로 빠지는지를 보면 픽앤롤인지 픽앤팝인지도 구분됩니다. 제 경험상 한 경기만 의식해서 봐도 금방 눈에 익습니다.
결론
농구 입문자에게 전술 하나만 설명해야 한다면 저는 픽앤롤을 가장 먼저 꺼냅니다. 규칙은 단순한데 알고 난 뒤 경기를 보면 전혀 다른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스크린 하나가 수비 전체를 움직이고, 그 움직임에 따라 5명의 공격 구조가 실시간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는 것, 그게 제가 지금 농구를 보는 방식입니다.
픽앤롤을 이해하고 나면 포인트가드가 왜 어려운 포지션인지도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공을 들고 수비의 선택을 읽으면서 몇 초 안에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선수니까요. 다음 경기부터 공이 없는 선수가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한 번만 의식해서 보시길 권합니다. 보이는 것들이 달라질 겁니다.
